사람의 머릿속을 넓은 땅과 같은 형상으로 떠올려본다면, 생각이란 그 위에 내리는 비와도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매일 끊임없이 비가 내리니 이내 연못이 군데 군데 생겨나고, 그 중에는 비가 한동안 그쳐 늪지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겠다. 물론 사막도 존재할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연못들을 가꾸어낸다. 얕고 넓은 연못들이 빽빽이 생겨나다 합쳐져 바다를 이룬 사람, 유난히 깊은 하나의 연못이 넓어져 호수를 이루고 주변에 나무와 풀들을 키워낸 사람. 이렇게 생각하니, 누군가의 머릿속 광경을 상상하는것도 재밌는 일이다.
내 연못들 중에는 유독 그 크기가 넓고 깊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단어이다. 말을 듣거나 하거나 아니면 혼자 생각하다 문득 하나의 단어에 사로잡혀 버리는 경유로 나는 단어들에 집착해왔다.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드러서면 처음에는 반복해서 그 단어를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내 집착은 시작된다. 그리곤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그 특정한 느낌의 발음으로 표현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의 경우 내 집착은 이 단계에서 끝이 난다. 많은 경우 그 유래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상형문자인 한자가 그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데에 그치기 때문이다. 보통은 귀엽네 라는 식의 감상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그 대상이 추상적인 개념이라면 집착은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하게 된다. 태초의 인류가 긍정의 표현, 예를 들어 서로의 의견에 동의하기 위해 “응” 이라고 이야기하거나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게 된 경위를 상상해보자. 동굴에서 살던 한 유인원이 위험이 득실거리는 밖으로 자신들의 터전을 이동하고 싶어한다. 매일 아침 바위를 타고 내려가 먹을것이 있는 초원까지 걸어가고 해질무렵 돌아와 암벽을 등반해 저녁을 맞이하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아직 약속된 의미의 음성표현을 갖고있지 않다. 그 유인원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함께 놀고 자란, 무리에서 가장 가까운 한 동료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끌어 동굴의 입구로 가 밖을 가리킨다. 해가 질 무렵인데 왜 나가자는건지 이해하지 못한 그 동료는 위험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거절을 표현하기 위해 빽뺵이는 소리를 낸다. 듣기 불편한 고음의 소리, 유인원은 그 소리에서 거절의 의미를 이해한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유인원은 무리에서 자신을 가장 다정히 챙겨줬던 이모 유인원에게 다가가 앞의 행동을 반복한다. 만에 하나의 확률로 이모 유인원이 이 유인원이 번갈아가며 반복적으로 가리키는 저 멀리 밖의 초원과 동굴 안의 무리들에서 인류 최초의 이주(移居) 를 이해했고 그 행위에 동참하겠다고 표현해야했다면 그 표현은 앞선 반대와 가장 정반대의 것이였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이모 유인원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그렇지만 결의가 가득한 “응” 을 소리내 뱉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나 거창한 탄생 배경은 없었을 것이다. 응은 인류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 그래서 부정의 표현과 가장 반대에 있는 소리로써의 의미를 적립했을 것이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런식으로 세계의 언어들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발음의 동의표현을 사용하게 됐을것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아니요는 어떨까? 글자마다 음절을 갖는 한국어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단어의 길이 또는 발음의 난이도가 단어의 사용 빈도 그리고 보편성과 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아니요’는 ‘예’보다 적게 사용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닐까 상상한다. 부정보다는 긍정을 장려하는 선조들의 뜻이 담겨있진 않을까 공상해본다. 아마도 따로 유래에 대한 정론이 있겠지만, 이런 상상 만으로도 단어들에 대한 마음가짐이 조금은 공손해짐을 느낀다.
2023년 글. 예, 아니요.